『걷기의 인문학, 리베카 솔닛 저, 김정아 역, 반비, 2017』

P18 그런 생각이 두 발로 지나간 곳에 장소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만들어진 장소가 다시 그런 생각을 만들어냈다. 걸었기에 골목과 도로와 무역로가 뚫린 것이고, 걸었기에 현지의 공간 감각과 대륙 횡단의 공간 감각이 생겨난 것이고, 걸었기에 도시들, 공원들이 만들어진 것이고, 걸었기에 지도와 여행안내서와 여행 장비가 생긴 것이다.

20p 인간의 의도적 행위 중에 육체의 무의지적 리듬 (숨을 쉬는 것, 심장이 뛰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 보행이다. 보행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 생각과 경험과 도착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육체노동이라고 할까.

26p 또 우리는 두 발로 걸을 때만 얻을 수 있는 공간 감각에 대해 이야기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은 집 안, 차 안, 헬스장, 사무실, 상점 등 서로 단절되어 있는 일련의 실내에서 살아간다. 걷는 사람에게는 모든 곳이 연결돼 있다. 걷는 사람이 실내와 실내 사이의 공간을 점하는 방식은 실내에 있는 사람이 실내를 점하는 방식과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세계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이런저런 실내가 아니라, 그런 실내들을 모두 포함하는 세계 그 자체다.

28p-29 걷기란 바깥, 곧 공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공적 공간에도 위기가 닥쳤다. 기존의 공적 공간이 방치되거나 잠식당하는 경우가 있 다. 모든 일을 실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 편의가 공적 공간을 유명 무실하게 만들기도 하고, 공포감이 공적 공간에 그늘을 드리우기도 한다.(아는 장소에 있을 때보다 모르는 장소에 있을 때 더 무서운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도시를 돌아다니지 않는 사람일수록 도시가 위협적이라고 느끼고, 도시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어질수록 도시는 정말로 외롭고 위험한 곳이 된다.) 처음 만들어질 때 공적 공간에 대한 고려가 아예 없는 경우도 많다. 공적 공간이었던 곳이 주차장이 되고, 도심 중앙로가 쇼핑몰 통로가 되고, 인도가 없어지고, 주차장으로만 출입할 수 있는 건물이 생기고, 시청 앞 광장이 없어지고, 도처에 담장과 철책과 게이트가 만들어진다. 이런 식의 건축 양식과 도시 계획을 만들어낸 것은 공포심이었다. 예를 들어, 여러 게이티드 '커뮤니티'로 구획되어 있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걸어 다니는 사람을 수상하게 여긴다. 도시 바깥도 마찬가지다. 한때 보행자를 유혹했던 외곽이나 시골은 자가운전 통근자 주거 단지 같은 보행자가 접근하기 힘든 공간으로 바뀌는 중이다. 문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 경우도 있다. 이로써 고독한 산책자의 사적 에피파니(epiphany)도, 공적 공간의 민주적 기능도 위기를 맞았다. 오래전 우리가 잠시 광장 같은 공적 공간으로 변한 그 광활한 사막에서 막아내고자 한 것이 바로 그 삶과 풍경의 파편화였다.

29p 공적 공간이 사라질 때, 몸도 함께 사라진다. 소노의 근사한 표현을 빌리면 몸은 돌아다니기에 알맞게 생겼다.

29-30p 무작위로 널려 있는 어떤 것, 체로 걸러지지 않은 어떤 것이 눈에 띄는 순간, 우리는 자기가 찾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던 그 무엇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한 장소가 의식으로 떠오르는 때는 그 장소가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주는 때다. 마음과 몸, 풍경과 도시가 잠식당하는 이때, 걷는 일은 그 잠식을 차단하는 초소이고, 걷는 사람은 그렇게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30p 보행에 역사가 있다면 그 역사는 무너져 내리는 굽이와 비슷한 지점에 이르렀다. 공적 공간이 없어지는 지점, 풍경이 아스팔트로 덮이는 지점,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여가를 오그라뜨리고 존재를 짜부라뜨리는 지점, 몸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니 건물이니 하는 일련의 실내에 존재하게 된 지점, 속도 숭배가 몸을 시대착오적이고 약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보행은 반쯤 버림받은 생각들과 경험들로 이루어진 풍경 속으로 접어드는 모종의 전복적 우회다.

53p 후설의 1931년 논문 「살아 있는 현재의 세계와 몸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주변세계(Die Welt der lebendigen Gegenwart und die Konstitution der ausserleiblichen Umwell)」는 보행을 중요한 경험, 곧 우리가 우리 몸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경험으로 그리고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우리 몸은 '늘 여기에 있음'의 경험이다. 움직이는 몸은, 몸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을 하나의 통일체로, 여러 '거기들'을 통로로 삼거나 목적지로 삼는 '여기'라는 지속성으로 경험한다.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움직이는 것은 몸이고 변화하는 것은 세계라는 것, 이것 이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그렇다면 여행은 세계의 유동성 속에서 자아의 연속성을 경험함으로써 세계와 자아를 이해하고 양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

61-62p 직립보행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거대한 지평이 열렸다. 무엇보다도 손이 생겼다. 할 일이 없어진 두 앞다리가 잡을 것, 만들 것, 부술 것을 찾아다니다가 손으로 진화 했고, 이제는 물질계의 조종간으로서 정교함을 더해가고 있다. 직립보행이 우리 뇌를 확장한 요인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고, 우리 섹슈얼리티를 확립한 요인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74p 세 명의 인류학자가 요새 유행하는 모든 보행 이론들을 학구적 스탠드업 코미디 루틴으로 요약해준 것은 1991년에 파리에서 열린 '이족보 행의 기원 컨퍼런스'에서였다."* 배달 가설'은 보행이 먹이와 새끼, 기타 물건들을 운반하는 데 적응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까꿍 가설'은 두 발로 선 것이 초원의 식물을 굽어보기 위해서였다는 설명이다. '바바리맨가 설'은 팻에게 큰 웃음을 준 거스리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직립보행과 페니스 노출을 연결 짓는 설명이다.(다만 거스리의 이론에서는 페니스 노출의 목적이 다른 수컷들을 위협하기 위함인 데 비해, 이 가설에서는 페니스 노출의 목적이 암컷 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다.) '물에 빠진 신세 가설'은 진화 과정 중에 물가에 살 았던 시기가 있었고 그 시기에는 물속에서 두 발로 걸었다는 설명이다.

'꽁무니 졸졸 가설'은 초원에서 떼를 지어 이동할 때 두 발로 걸었다는 설 명이다. (진화론에서 줄기차게 등장하는 그 초원이 또 등장한다.) '뜨거워도 좋아 가설'은 비교적 진지한 가설 중 하나로, 이족보행이 열대의 한낮에 일광 노출을 줄여준 덕분에 직사광선이 내리쪼이는 뜨거운 서식지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설명이다. '둘이 넷보다 좋더라 가설'은 다른 영장류에게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될 영장류에게는 이족보행이 사족 보행보다 에너지 효율이 높았다는 설명이다.

75p “유인원의 발달 과정에서 직립보행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직립보행은 인간의 조상과 그 외 영장류 사이의 가장 큰 구별점인 듯하다. 이로써 손이 해방되면서 운반, 제작, 섬 세한 조작을 비롯한 무수한 가능성이 펼쳐졌다. 사실 오늘날의 모든 기 술력은 직립보행이라는 하나의 능력으로부터 기인한다. 단순화하자면, 앞다리에 주어진 새로운 자유는 하나의 도전이었고, 두뇌의 확장은 그 도전에 대한 응전이었다. 그것이 인류의 시작이었다."

76p 직립보행을 시작한 초기 유인원은 나무 그늘 없는 초원을 지날 때 직사광선에 최소한으로 노출됨으로써 숲을 벗어나 점점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는 이론이다. "이로써 '전신 체온 상승 억제'가 가능해지 면서 신체의 각 부분, 특히 뇌로 가는 혈액의 온도가 낮아져 열사병 방지에 도움이 되었고, 이로써 사람속(Homo)의 뇌 용량이 생리적 제약을 벗어났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종은 점점 멀리까지 걸어갈 수 있게 된 동시에 뇌 크기를 점점 키울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포크는 뇌 진화와 뇌 구조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통해 휠러의 이론을 뒷받침하면서 직립보행이 지능 발달의 충분조건은 아니었지만 필요조건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123 영어에는 무수한 이동의 비유가 각인되어 있다. 똑바로 이끌고(steer straight),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move toward the goal), 멀리 가려고 하고(go for the distance), 앞서고(get ahead), 끼어들고(get in one's way). 가로막고(set one bac), 길을 찾고(fnd one's way), 먼저 출발하고(get a head star), 높은 자리에 오르고 (move up in the worla), 갈림길을 만나고(reach a fork in the road), 절차를 밟는다(ake steps). 그러지 못하면, 길을 잃고(get lost), 엇나가고(get out of step), 방향감각을 잃고(lose one's sense of direction), 힘든 오르막길을 만나고(ace an uphill struggle), 내리막길에 접어들고(go downhill), 어려운 곳을 지나 게 되고(go through a dificult phase), 제자리에 맴돌고(go in circle), 아무 진전이 없다(go nowhere), 속담이나 노래 가사에는 훨씬 더 현란한 미사여 구들도 있다. 환락의 길(the primrose path)이 있으면 망하는 길(the road to ruin)이 있고, 높은 길과 낮은 길(he high road and the low road)이 있고, 편한 길(Gary ste)이 있으면 외로운 길(oney srce) 이 있고, 깨진 꿈들의 길 《the boulerard of broken dream)도 있다. 일상적인 표현에도 보행의 비유가 많이 등장한다. 선두에 나서고 (et the pace, 장족의 발전을 하고(make 8rcat stride), 보조를 맞추고 (keep pac), 자기 페이스에 도달하고 (hit ones stide, 노선을 따르고(oc the line),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간다(ollow in somebody's Gootsteps). 심리적, 정치적 상황에 공간의 비유를 사용하는 것 도 가능하다. 마틴 루서 킹의 마지막 연설에 나오는 "산봉우리에 올랐습 니다."는 영혼의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예수가 실제로 산에 올라감으로써 도 달하게 되는 상태와 공명하는 표현)이다. 킹의 첫 번째 저서 『자유를 향한 대 행진」은 출간되고 30년이 넘게 흐른 후에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으로 메아리쳤다. 역시 남아공 문제 에 헌신했던 도리스 레싱(Doris Lesing)의 회고록 제2권 제목은 『그늘을 걸으며(Walking in the Shade)」이다. 키르케고르의 책 중에는 『인생길의 계단 들(Siadier paa Livds Fa)」이 있다. 문학 이론가 움베르토 에코(Umberto Bco)는 「소설의 숲속을 여섯 번 거닐다(Sei passesiale na bosthi namalion) 에서 책을 읽 는 일을 숲속에서 산책하는 일에 비유한다.

124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 혹은 삶 그 자체를 여행에 비유할 때 가장 자주 떠오르는 이미지는 걷는 여행, 혹은 개인사의 풍경을 가로지르는 순례자의 역정이다. 나 자신을 상상할 때 자주 떠오르는 이미지도 내가 걸어가는 모습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이승을 걷는 것(walk the earth)'이 고, 직업은 '이승의 행보(walk orite'이고, 전문가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walling encydopedia)이다. 구약성서는 은총을 받은 상태를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he walked with God)고 묘사한다. 걷는 사람, 즉 한 곳에 머물기보다 혼자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가는 사람의 이미지는, 초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유인원이든 시골길을 어기적어기적 걸어 내려오는 사뮈엘 베케트(Samue Becket)의 등장인물이든 인간의 의미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걷는다는 비유가 비유이기를 그칠 때는 우리가 실제로 걸을 때다. 삶이 여행이라면, 우리가 실제로 여행할 때 우리 삶은 실제의 삶(도착이 가능한 목표 지점, 확인이 가능한 진행 과정, 이해가 가능한 평가 결과가 수반되는 삶)이 된다. 비유가 행동과 하나가 된다고 할까. 미로를 걸으면서, 순례에 나서면서, 산을 오르면서, 어떤 분명하고 바람직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을 글자 그대로의 길(오감을 통해서 영적 차원에 접근하는 길)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걸어가는 것, 여행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의 중요한 비유라면, 모든 걷기와 모든 여행을 통해(그중에서도 특히 십자가의 길과 미로를 통해) 우리는 모종의 상징 공간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

130p 길을 닮은 책은 걷기라는 ’읽기‘를 통해 세계를 그려나간다.

196p 특별히 보행을 다른 최초의 수필은 해줄릿 18521년에 데 나며(On Coing Jounc) 이다. 자연 속'을 걷는 것의 기준, 그리고 이루의 따라올 보행 문학의 기준을 마련한 글이다. 이 글의 서두에 따르면 1품에서 제일 기분 좋은 일 가운데 하나는 길을 떠나는 것인데, 나로 말하지면 혼자 떠나는 것을 좋아한다." 걸을 때 혼자인 편이 좋은 이유는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내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 책의 의미를 번역”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고, "나는 내 막연한 상념이 민들레 솜털처럼 날아다니 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지 그 상념이 논쟁의 가시덤불에 엉켜 붙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7 보행과 사유의 관계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글이다.

281 도시 보행은 호객, 크루징, 산책, 쇼핑, 폭동, 시위, 도망, 배 회 등, 아무리 즐거워도 자연을 향한 사랑 같은 고고한 도덕적 올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행동들로 쉽게 바뀐다. 그러니 도시공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그런 주장을 펴는 얼마 되지 않 는 자유주의자들과 도시이론가들조차 보행이 공공장소를 사용하고 공 공장소에서 거주하는 가장 흔한 방법이라는 점을 거의 인지하지 못했다.

410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들이 겪은 극적인 변화에 못지않게 사람들이 그 런 공간들을 상상하고 경험하는 방식도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1998년 <라이프>에 지난 수천 년의 중대 사건들을 기리는 기사가 났는데, 기차 사진이 실린 지면에 이상한 대목이 있었다. "인간 역사에서 얼마 전까지 만 해도 모든 육상 교통의 추진체는 오직 하나, 발이었다. 여행자 자신의 몸통 끝에 달려 있을 수도 있고, 여행자를 태운 동물의 몸통 끝에 달려 있을 수도 있지만, 어디 달려 있든 똑같은 문제점이 있었다. 느리고, 날씨가 나쁘면 이용할 수 없고, 음식물과 휴식이 필요하다. 1830년 9월 15일, 발이라는 추진력은 드디어 비로소 기나긴 퇴화의 도정에 올랐다. 관악대 연주를 배경으로, 전 세계 최초의 본격 증기기관차가 출발하는 장면을 보기 위해 100만 명의 영국인이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 모였다. 1··••·!

개통식에서 한 국회의원이 기관차에 치어 숨졌지만, 리버풀-맨체스터 철도는 전 세계적으로 철로 부설 열풍을 불러일으켰다."1* 공장이나 교외가 산업혁명의 일부분이었듯 기차도 산업혁명의 일부분이었고, 공장의 기계가 생산 속도를 끌어올렸듯 기차는 재화의(이어서 여객의) 운송 속도를 끌어올렸다.

<라이프>의 가정은 흥미롭다. 몸으로서의 본성(nature)과 기후로서 의 자연(nature)이란 우리를 이따금 불편하게 하는 불변의 요인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문제점이며, 진보란 기차를 통해서(그리고 이어서 자동차, 비행 기, 전자통신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과 자연을 극복해내는 것이라는 가정.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 휴식을 취하는 것, 움직이는 것, 날씨에 영향을 받는 것이 육체를 가진 존재의 일차적 경험들이라고 할 때, 이런 경험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생명활동을 문제시하고 육체의 감각을 문제시한다는 뜻이다. 위에서 인용한 대목, 특히 "발이라는 추진력은 드디어 비로소 기나긴 퇴화의 도정에 올랐다."라는 섬뜩한 문장은 그런 시작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라이프》는 물론이고 기차역에 모였던 군중 도 압살당한 국회의원에게 별다른 애도를 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떻게 보자면, 기차에 압살당한 것은 그 한 사람의 육체만이 아니었다. 기차는 인간의 지각과 기대와 행동을 우리의 육체가 존재하는 유기적 세계로부터 단절시켰고, 이로써 그 세계를 구성하는 장소들을 변형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런 장소에 존재하는 모든 육체를 압살한 셈이었다. 본성 또는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는 흔히 자연적 공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느끼고 숨쉬고 살아 움직이는 육체가 본성 또는 자연의 일차적 경험일 수 있으므로, 새로운 기술력과 공간이 초래하는 육체로부터의 소외, 공간으로부터의 소외도 본성 또는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일 수 있다.

412 여행자와 여행지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파괴한다, 여행자는 기차를 발사 된 총알로 경험하고, 기차 여행을 풍경 속으로 발사됨으로써 감각 제 력을 상실하는 일로 경험한다. 1mad 기차라는 중알 속에 앉아 있는 여행 자는 여행을 한다기보다는 (19세기에 인기가 있었던 비유를 쓰자면) 짐짝처럼 옮겨졌다. 기차가 생긴 이후로는 우리의 지각도 좀 빨라졌지만, 초기 여행자들은 기차가 어찔할 정도로 빨리 달린다고 느꼈다. 기차가 생기기 이전의 육로 여행자들은 주위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지만, 19세 기 기차 여행자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나무, 언덕, 건물 같은 것과 시각적 관계를 맺기에는 기차가 너무 빨리 달렸다. 두 장소를 잇는 땅과의 공간적, 감각적 관계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두 장소를 갈라놓는 것은 그저 시간, 그것도 점점 단축되는 시간뿐이었다. 여행 속도가 빨라지면서 여행은 더 재미있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재미없어졌다. 기차 여행자가 모종의 공간적 림보에 빠진 것은 교외 거주자와 마찬가지였다. 언젠가부터 기차 여행자들은 책을 읽고 잠을 자고 뜨개질을 하고 지루함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자동차와 비행기로 인해 극도로 증폭되었다. 제트기 승객이 1만 미터 상공에서 영화를 보게 된 것은 공간과 시간과 경험이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폴 비릴 리오(Paul Vinlio)에 따르면, "교통편이 보행에 필요한 육체적 수고를 지양 하는 단계에서 최초의 고속 교통편이 보행에 따르는 감각-운동을 제거 하는 단계를 지나, 이제는 감각의 박탈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다. 예전 여 행에는 흥분과 떨림이 있었다면, 지금은 중앙 스크린에서 영화가 상영된다.

413 대륙 횡단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육체(예컨대 존 뮤어의 육체, 윌리엄 워즈워스의 육체, 평화 순례자의 육체)를 경험하는 방식과 차 없이는 저녁 외출조차 불가능할 것 같은 육체를 경험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자동차는 이제 의족이 되었다. 의족은 보통은 다리가 망가졌거나 없어졌을 때 필요해지지만, 자동차라는 의족은 육체가 망가졌을 때, 곧 인간적 규 모를 넘어선 세계가 육체의 개념을 망가뜨렸을 때 필요해진다.

426 앞으로 보행 문화가 탈산업적• 탈근대적 공간 상실, 시간 상실, 유체이탈에 저항하면서 계속 걸어 나가는 반문화, 하위문화가 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문화들은 대부분의 경우 소요학파 철학자들이나 시를 지으면서 걸어 다닌 시인들, 불교의 보행 명상 수행자들 등의 고대 보행 관습을 끌어들이거나 하이킹이나 만보 같은 오래된 보행 관습을 끌어들인다.

431 예술 매체로서의 보행을 탐구하는 일에 가장 전념해온 현대 예술가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롱(Richard Long)이다. 그가 지금까지 한 작업들의 성과 대부분이 그의 1967년 초기 작 「걸을 때 그려진 선(Line Made by Walking)」에 이미 등장하고 있다. 잔디밭 한복판에 직선으로 나 있는 길이 잔디밭 끝 숲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롱 자신이 두 발로 낸 길을 찍은 사진이다. 관습적 작품에 비해서 더 야심찬 면도 있고, 더 수수한 면도 있다. 작품의 규모가 크다는 점, 그리고 세상 속에 흔적을 남겼다는 점이 야심적이라면, 보행이라는 평범한 행동을 통해서 만든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작품이 문자 그대로 땅바닥, 발밑에 있다는 점은 수수하다. 작품의 성격이 애매하다는 점은 당시에 등장한 다른 많은 아티스트들과 마찬가지였다. 「걸을 때 그려진 선」은 퍼포먼스 작품이고 선은 작품이 남긴 흔적일까? 아니면 「걸을 때 그려진 선」은 조각(선)이고, 사진은 작품을 찍은 기록일까? 아니면 사진이 「걸을 때 그려진 선」일까? 아니면 모두 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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